계피 동요집 [빛과 바람의 유영]
사람들은 자신의 유년이 행복했다고 믿기를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을 대할 때도 그들이 단순하며 근심걱정 없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어른의 복잡한 삶과는 달리 아이의 삶은 쉽고 그들의 감정은 얕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나를 들여다볼수록 어른인 나의 감정은 그 종류든, 강도든, 아이였을 때의 감정과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나를 이루는 가장 밑바닥의 핵심은 일곱 살 때 그대로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내향적인 어린 아이였고, 빛과 바람 속에 유영하는 기분으로 있을 때 가장 충만했으며, 그 충만함에는 어딘지 가슴이 아린 데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192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만들어진, 내가 사랑했고 어린이 합창단을 하며 그리도 많이 불렀던 동요들은 아름다운 멜로디 속에 어떤 그림자를 담고 있다. 소식을 알 수 없이 헤어진 오빠(오빠생각), 꽃을 좋아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꽃밭에서), 나만 외떨어진 바보인 것 같은 외로움(개똥벌레), 생활고 때문에 아이를 홀로 남겨두고 일을 하는 엄마(섬집아기), 어쩌면 다시 갈 수 없는 황금빛 강변의 집(엄마야 누나야)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동요들이 만들어지던 시대와 지금은 사회적 상황이 달라졌고, 아이들의 경험도 그 때와는 많이 다르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림자는 아이들의 빛과 바람 속에 남아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부터 이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느 날 한 아이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행사 때문인지 나머지는 전부 똑같이 아래위로 새빨간 옷을 입고 있었는데 혼자 옅은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아이는 흙장난 하는 아이들 주변을 조금 맴돌다가 힘없이 벤치로 가 앉았다. 떨어진 꽃처럼 오도카니 있는 아이를 보며 나는 나의 어린시절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무엇인가라도 해주고 싶었다. 잘 적응할 줄 모르는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누구라도, 혹은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은 그런 상황에 처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날부터 작업이 시작되었다.
원곡의 정서와 주 멜로디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다섯 명의 편곡자들과 함께했다. 박성도(오빠생각, 반달), 서영호(노을), 안신애(옹달샘, 과수원길), 형광소년(구름), 홍혜림(개똥벌레, 섬집아기, 엄마야누나야)이 그들이다. 모두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로, 각자의 감수성과 색깔을 노래에 또렷하게 덧칠해주었다. ‘2019’는 이 앨범에서 유일한 신곡이다. 동요는 아니지만 앨범을 대하는 내 마음을 잘 전할 수 있는 곡이어서 수록했다.
커버의 그림에는 마음을 다친 아이가 홀로 숲에 소풍을 와 있다. 신록의 이파리와 꽃이 흩날리는 황홀한 풍경 속에서도 아이는 쓸쓸해 보인다. 소풍을 마치고 돌아갈 때 쯤은 아이가 빛과 바람의 힘으로 그림자도 버틸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 아이를 가족들이 꼭 껴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 계피
가을방학의 계피 동요집에 그림을 싣게 되었다. '숲으로의 도망'시리즈가 앨범의 전체 분위기와 맞아떨어져 주어진 좋은 기회였다. 메일을 처음 받았을 때 참 반가웠던 이유는, 가을방학 1집을 대학졸업 선물로 좋아하는 동기 친구에게 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앨범속에는 작은 메모지에 졸업 축하한다는 메세지가 들어있었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한 시절이 모조리 불러와지는 경험을 때때로 하지 않던가. 가을방학 1집이 바로 내게 그런 음악 중 하나였다.
메일로 가수가 미리 보내주신 데모 음악을 들어보고 어울릴 것 같은 그림들을 몇 개 추천했다. 그중에 디지털 앨범과 CD에 사용하기 위한 '숲으로의 도망'시리즈 그림 중 하나가 쓰이게 되었고, 4월 7일인 오늘 음원이 발매되었다. 아마 CD도 곧 발매된다고 알고 있다.
앨범커버에 쓰인 이미지는 <숲으로의 도망> 시리즈 그림이다. 여럿이 소풍을 왔을 텐데 어쩐지 홀로 있는 아이. 즐겁게 어울려 노는 풍경이 자연스러운 5월, 그 사이의 쓸쓸함. 숲으로의 도망 시리즈를 작업할 때,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했던 나를 자주 떠올린다. 그림 속에 두명 세명을 등장시켜보려고도 했는데 이상하게 그게 참 어려웠다. 이제서야 내 그림을 보면서 내 얘기구나- 싶다. 항상 어울리는 게 어려워 자주 눈물을 보이던 그 시절. 그 때는 음악과 친하지 않아 노래로 나를 달랠 줄은 몰랐고, 집에 가면 혼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홀로 하교하는 학생의 옆모습을 보면 오랫동안 눈길이 머문다. 얼마 전에는 초등학교 근처에서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넷이 가는 모습을 봤다. 네명이 걸어가고 있었지만 셋은 앞에, 한명은 뒤에 있었고 셋이서만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앞서가던 세 아이들이 홱 뒤를 돌더니 따라오던 아이에게 "우리 여기서 같이 가지 말고, 이따 구름다리에서 만나자."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왜?"라고 묻지만 앞서가는 셋은 대답없이 속도를 내서 걷는다. 계속해서 뒤에있는 아이가 따라오자, 이제는 손으로 밀어내면서 따라오지 말라고 한다. 따라가던 아이는 그 말을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것 같았다. 셋이 거의 뛰다시피 앞서가버리자 "그럼 이따 거기서 보는 거 맞지?"라고 되묻더니 혼자 뒤돌아서 걸어갔다. 보는 내가 다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그 아이는 울지 않았고 나를 힐끗 보고는 무안했는지 혼잣말을 하며 걸어갔다. 넷은 셋과 하나로 갈라졌다.
음악 소개를 상세히 듣고 나서 앨범을 듣자 코끝에서 신호가 온다. 어렸을 적 혼자일 때, 당황스러워서 얼굴이 붉어지고 울음을 참을 때 목구멍이 좁아지는 것 같은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무래도 지금은 좀 괜찮다. 혼자 밥도 잘 먹고 어디에나 잘 간다. 오히려 사람들은 혼자 다니는 나를 대표 이미지로 기억한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다. 어울림은 어렵고 사람들 속에서 외톨이가 될 때마다 내가 어디쯤 위치 해야 하는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언제쯤 나는 '진짜 혼자'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쯤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우연히 만난 음악이 나의 한 세계를 기억하게 한다. 동요를 부르는 어른의 고요한 마음이 나의 쓸쓸한 어린 시절을 만나는 기분이다.
"소풍을 마치고 돌아갈 때쯤은 아이가 빛과 바람의 힘으로 그림자도 버틸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 아이를 가족들이 꼭 껴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에서는 친구들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선생님은 늦게 버스로 온 나를 걱정하고 짝을 지어 자리에 앉히겠지.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은 꼭 나를 안아줄거고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놀았어?"라는 질문에 "응."이라고 크게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 잠자리에 든 아이는 홀로 맞이한 빛과 바람으로 오늘을 즐겁게 기억하며 잠들 수 있지 않을까. 빛과 바람이 유영하는 봄날의 오후, 그림 속 아이의 이야기를 하루종일 들어주고 싶다.